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사 상륙작전 (문단 편집) === 철수 완료 === 해군본부 작전명령 갑 제151호에 따라 급파된 LST [[http://www.sj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82|조치원호]]는 9월 19일 06시 경에 부근 해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조치원호는 승선한 해군장교들과 민간인 선장 모두 이런 상륙작전 지원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현장에 도착해서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자 16일에 파견된 미 육군의 스페어 소령이 직접 나섰다. 스페어 소령은 소속은 육군임에도 LST 조함 경험도 있을 정도로 상륙작전 경험이 풍부했고, 전황을 냉철하게 파악했다. 그의 조언으로 철수 순서는 제28연대(1중대)-제37연대(5중대)-사령부-제32연대(3중대)-제29연대(2중대)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민간인 선장은 겁을 잔뜩 집어먹어 배를 포화가 난무하고 어디에 암초가 있을지 모르는 해안으로 몰고 가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스페어 소령은 선장을 설득하고 때로는 직접 조타하기까지 하며 문산호가 좌초한 지점 북쪽 360m(400야드), 해안으로부터는 약 30m 되는 지점에 착안시킨다. 문제는 조치원호가 제대로 된 LST가 아닌 관계로 더 이상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상륙 때와 마찬가지로 밧줄을 연결해 병력들이 이걸 붙잡고 와서 승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승선 시간이 상당히 소요됨에 따라 그만큼 적의 공격에 많이 노출될 것이고, 상륙 당시에 이미 큰 피해로 충격을 입은 유격대원들로서는 다시 해내기 쉽지 않은 임무였다. 스페어 소령은 이때도 본인이 직접 밧줄을 잡고 해안으로 상륙하여 유격대원들의 동요를 막고 승선을 독려하였다. 스페어 소령은 국적과 군종을 초월한 이러한 용맹한 활약을 인정받아 미 육군 장교임에도 해군 십자훈장([[https://en.wikipedia.org/wiki/Navy_Cross|Navy Cross]])을 수여받았다.[[https://testvalor.militarytimes.com/hero/5744|#]][* [[6.25 전쟁]] 중에 이처럼 미 육군 장병이 해군 십자훈장을 받은 경우는 딱 3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06시 30분 경부터 철수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조치원호가 해안으로 접근하면서 북한군 진지에서도 비상이 울렸다. 북한군은 처음에 이것이 철수가 아니라 증원부대가 도착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내 철수 조짐이 보이자 기세를 올려 해안으로 화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미군의 화력지원이 이어졌다. 상륙 때는 공군 지원이 전혀 없던 것과 달리 3대의 항공기가 지원을 나와 북한군 진지에 계속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특히 미 해군 95.2기동전단의 화력은 가공할만한 수준이었다. 기함인 USS 헬레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강의 [[중순양함]]으로 꼽히던 [[볼티모어급 중순양함|볼티모어급]]으로, 8인치 함포 총 9문(3연장 포탑 3기)과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5인치 부포]] 12문(2연장 포탑 6기)을 갖추고 있어 이 한 척이 퍼부을 수 있는 화력만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8인치 함포는 구경을 환산하면 200mm가 넘어가는 대구경 포다. 육군이라면 일반 야포가 아니라 요새포나 열차포로 분류되는 물건을 9문이나 달고 뻥 뻥 쏴댔다.][* 삼척 포격 당시에는 95.2기동전단에 무려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전함)|미주리]] 함까지 지원을 나와 있었는데, 이후 전개된 장사 상륙작전 화력 지원 임무까지 [[미주리(전함)|미주리]] 함이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화력지원에 힘입어 철수 과정에서의 피해는 상륙 때보다는 적었다. 그럼에도 미 해군장교 1명이 부상을 당하고 유격대원들 가운데도 전사 9명, 부상 12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한군은 화력이 크게 열세였지만 그래도 박격포탄이 조치원호를 정확히 가격하여 승선한 유격대원 가운데서도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 철수 완료 목표시간은 12시까지였으나, 이때까지도 승선이 완료되지 않아 약 60명이 해안에 남아 있었다. 겁을 먹어 빨리 빠져나가려는 조치원호 선장의 독촉과 한 명이라도 더 철수시키려는 이명흠 대위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30여 명이 더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시가 넘어서자 썰물로 접어들며 더 지체하다가는 배가 빠져나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철수를 진두지휘하던 스페어 소령도 더는 버틸 수가 없어 결국 일부 병력을 뒤에 남긴 채 퇴각을 명령한다. 이에 13시 33분경 조치원호는 후비대로 최후까지 해안에서 적을 저지하던 29연대 5대대(제1 유격대대 2중대 5소대) 39명을 뒤에 남기고 해안을 빠져나온다. 이들은 모두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약 64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조치원호를 타고 이튿날인 9월 20일 새벽에 부산항에 입항했다.[* 정확한 철수인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640~725명 등으로 엇갈린다. 640명 귀환은 해군본부의 작전경과보고서에 담겨진 내용이다. 당초 840여 명의 상륙병력 중에 39명의 포로를 비롯해 상륙 및 철수 과정에서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상륙 후 지상전에서 발생했을 사망자, 미 해군 헬리콥터로 후송된 일부 중상자 등을 감안하면 640명 귀환 쪽이 더 현실적인 숫자로 보인다.] 조치원호 입항 이후 이명흠 대위는 작전결과 보고를 위해 당일 육군본부로 출두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의하면 [[강문봉]] 등 관계된 장교들을 만나자, 이들은 모두 '''이명흠이 왜 살아 돌아왔는지 크게 놀라고 당혹'''해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문산호를 그대로 버리고 온 죄를 물어 군법회의에 회부, 총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육방부|한국 및 미국 해군이 적극적으로 구출에 나섰던 데 비하면 너무나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한국 육군 쪽에서는 제1 유격대대를 여차하면 버리는 카드로 인식하고, 아예 적 후방에서 최후까지 옥쇄해서 북한군을 더 괴롭히는 걸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